울 효준방/*여수

여수 인물

김 또깡 2009. 11. 26. 09:44

 

 

이 충무공과 함께 순절 황씨문중 두사람

      득중(得中)과 상중(祥中)

 

임진년 난세를 당해 의롭게 순절한 여수 인물은 한둘이 아니다.창원 황씨 문중에도 이 충무공과 함께 공을 세우고 순절한 두 장수가 있었다. 황득중(黃得中)과 황상중(黃祥中)이 그 분들이다. 이름으로만 보면 친형제처럼 느껴지나,득중은 회산군파로, 상중은 시중공파로 고려 때부터 분파하여 세계를 이어 왔기 때문에 본관만 같을 뿐이다. 조선왕조실록,난중일기,여수여천삼강록 등에서 두 장수에 대한 기록을 더듬어 볼 수 있다.

 황득중은 조선 1556년(명종 11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곱고 영특하여 칭찬을 받고 자란 그는 시서(詩書)를 부지런히 읽고 틈틈이 무예를 익혀 32살이 되던 1588년에 무과에 급제했다. 왜구들이 난입하는 임진란이 일어났다. 황득중은 분기탱천하여 군사의 시재(試才), 무예 훈련 및 병서 습독을 관장하던 훈련원 판관을 그만두고 곧바로 이 충무공의 휘하 조방장이 되었다. 노량을 거쳐 경상도로 출진한 전라좌수영 수군은 가는 곳마다 승리였다. 특히, 황득중이 이끄는 수군은 한산도에 이르러 거제에 숨어 있던 복병의 적선 100여척을 대파하는 전과를 올렸는데, 조정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승자(陞資)하기도 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는 명량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이듬해, 황득중은 전라좌수영 수군과 함께 순천으로 도주한 왜구들과 절이도(현재 거금도)에서 해전을 벌이다 순직을 하게 된다. 이 충무공은 몹시 슬퍼하며 순절한 황득중 장군을 수습하게 하여 좌수영 구봉산 남록에다 장례를 치르게 한다. 후에 선무일등공신으로 녹선이 됐으며, 병조참판의 증직이 내려지기도 했다.

 황상중(黃祥中)의 자는 응지(應址)요, 호는 송와(松窩)이다. 그는 1570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지략이 대단했던 그는 1588년 무과에 올라 평안북도 벽동(碧潼) 군수를 지내면서 처음으로 벼슬길로 나섰다. 군수로 있는 동안 치적을 쌓은 그는 군기사 첨정으로 옮겨 조정에서 병기일을 보다가 정유재란을 당했다.

 황상중은 이 충무공을 따라 전라도 남해안에서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이듬해인 1598년 무술년에 전라좌수영 수군은 순천 왜성에 배수진을 치고 있던 왜구들과 마지막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이 때 황상중은 김대인 장군과 더불어 고니시 유기나가의 첨병이 진을 치고 있던 장도로 기습하여 적의 수급 수십을 획득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던 1598년 11월 18일, 황상중은 야밤에 적진으로 돌격하다가 불행하게도 적탄을 맞고 전사한다. 이 날은 이순신 장군이 순절한 날이기도 하다. 이 비보를 접한 아들 순(洵)이 내려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쌍봉 반월마을 토미산 북록에 안장했다. 사후 조정에서는 선무원종훈으로 녹선하고 호조참판의 증직을 내렸다.

 아직도 여수에는 창원 황씨 회산군파와 시중공파 후손들이 선조의 선무 공훈을 기리며 이름 있는 일족을 이어 가고 있다.

 

 

 

 

 

 

 

출처: 여수 인물전 (전남대 교수 김 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