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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시인 윤 동주의 생애와 시

김 또깡 2010. 3. 12. 22:00

 

민족시인 윤 동주의 생애와 시

 

 

 

 

 

 

윤 동주 시인님은 1917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 영석(尹永錫),어머니 김 용(金龍)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명은 해환(海煥).

윤 동주 시인님이 시를 썼던 시대인 1936~1943년은 온 인류가 시를 외면한 시대였다. 그가 릴케와 프랑시스 잠을 노래했을 때는 포연(砲煙)이 장미의 향기를 쫓고 나귀 등에다 탄환을 운반하던 때였다. 그가 즐겨 바라보던 하늘과 바람과 별의 허공엔 공습 경보가 요란하게 울리던 시절이었다.

  인간의 역사 중 사람의 생명이 가장 값싸게 거래되었던 시대였고,자유.평등.박애가 군국주의의 넝마주이 집계에 집혀서 오물처리장으로 실려 가던 때였다. 철학자에게는 복종의 철학이 강요되고,음악인에겐 군가 작곡이 명령되며, 시인에게는 원고지와 펜으로 탄환을 만들 것을 강요하던 시대였다.

 

                   <1935년 숭실학교 시절 교복을 입은 윤동주(뒷줄맨 오른쪽)와 문익환(뒷줄 가운데)>

 

  이 시대엔 고향을 애절하게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성립되었고, 친한 벗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것까지도 감시를 받았다. 하물며 창씨 개명(創氏改名)도 하지 않은 '순이'에 대한 추억이나 '흰 옷'과 '살구나무'와 '희망의 봄'이야 영락없는 불온(不穩)이었다.

  1940년 전후 지구는 군가와 화약냄새로 가득차 있을 때,한국 문학사는 이 시대를 '암흑기'로 말한다. 시와 소설의 발행고가 가장 낮은 시대였을 뿐만 아니라 그질적인 면에서도 예술적 여과를 거치지 못했으며,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식민 종주국의 이익에 보템을 준 것이 많아서, 암흑기란 시대적 명칭은 자연스럽게 사용되어 왔다.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짧은생애를 마감.윤동주 시인의 장례식 용정자택>

  윤 동주 시인님은 바로 이런 암흑기의 몇몇 유성 중 뛰어난 시인의 하나이다. 이 시대에 우리는 어학자 이 윤재(李允宰)와 시인 이 육사(李陸史) 그리고 윤 동주 시인님을 함흥과 북경과 후쿠오카(福岡)의 옥중에서 잃었다.

  고문.영양실조.동상 그리고 정신적 고뇌 등으로 일관된 하루하루의 옥중생활을 윤 동주 시인님도 1943년 7월,체포 이후1945년 2월 16일, 죽는 날까지 반복했을 것이다. 윤 동주 시인님의 동생 윤 일주의 기록에 따르면 1944년 6월 이후 월 1매의 엽서 쓰기가 허락되었다고 하는데, 아마 이때가 형(刑)이 확정된 때로, 그 이전엔 모든 외부와의 연락이나 독서가 금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고향 용정에있는 윤 동주 시인님의 생가>

 

  그 후 생체실험 주사를 맞았다고 하는데, 그 내용물은 아직도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으며, 최후의 순간에 큰소리를 치며 죽었다는 간수의 증언도 그 내용은 알 수가 없다. 모국어의 순수 시인이 우리말로 고함 지르고 죽은 심정이야 이해가 가지만 왜 간수에게 일어로 한마디를 남기지 않았을까!

 

 

*윤 동주 시인님의 발자취를 알아보자*

 

 

*1917년 출생은 서두에서 말씀들었고.....

*1925년 명동 소학교에 입학함.

*1929년 송 몽규(宋夢奎) 등 급우와 함께 "새 명동" 이란 신문 형식의 등사판 문예

    지를 만들어 동요. 동시 등 발표함.

*1931년 3월, 명동 소학교를 졸업하고 대립자(大粒子)의 중국인 학교에 1년간 다 

    님.

*1932년 4월, 용정(龍井)의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교내잡지.스포츠.웅변 등 다

    방면으로 활동함.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함.

*1935년 봄, 평양 숭실(崇實)중학교로 전입학, 기숙사에 기거하며 독서와 시작(詩

    作)에 몰두함.

*1936년 봄, 숭실중학이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사건으로 폐교되자 용정의 광명

    학원(光明學園)중학부 4학년에  전입학. 북간도 연길(延吉)에서 발행하던

    하던 "카톨릭 소년" 지에 용주(龍舟)라는 필명으로 '병아리' . '빗자루' 등

    동요. 동시 발표.

*1937년 같은곳에 '오줌싸개 지도' . '무얼 먹고 사나' . '거짓부리' 발표.

*1938년 2월, 광명학원 중학부 5학년 졸업. 4월에 고종(姑從)인 송 몽규와 함께 서

   울 연희 전문학교(延僖專門學敎)문과에 입학.

*1939년 산문 '달을쏘다'를 조선일보 학생란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발표.

*1941년 연희 전문학교 문과 발행인 "문우(文友)"지에 '자화상' .'새로운 길' 발표.

    12월에 연희 전문학교 문과 졸업. 19편으로 된 자선시집(自選詩集) "하늘

    과 바람과 별과 詩"를 졸업기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1942년 일본 동경 입교대학 영문과 입학. 여름방학 때 마지막으로 고향 용정에 다

    녀감. 가을에 경도(京都) 동지사대학(同志社大學)영문과에 편입학.입교대

    학 시절의 시 5편이 마지막 작품이 됨.

*1943년 7월, 귀국하기 직전에 경도 제국대학에 재학중이던 송 몽규와 함께 독립

    운동의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가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됨.

*1944년 6월, 경도 지방재판소에서 독립운동의 죄명으로 2년형을 언도받고 송 몽

    규와 함께 구주(九州) 복강(福岡) 형무소에 투옥됨.

*1945년 2월 16일, 위의 형무소에서 옥사함(3월10일 송 몽규 옥사) 3월 초에 고향

    용정의 동산(東山)에 묻힘.   

 

윤동주 시인님을 제가 좋아하는 이유를  여러블로그님이 아실거라 믿습니다.

다음코너에는 윤 동주 시인님의 민족시인이고 저항주의 시인인지....다음 글에서

밝혀보고자 합니다.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하여 다 함께 노력 합시다!!!

http://blog.daum.net/kkr3225

 

 

 

 

손가락 운동하시는것 잊지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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